성육신의 참 뜻
요 셉 드베스터(Jozef de Veuster, 1840-1889)는 1840년 벨기에에서 옥수수 상인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 아우구스테(Auguste)의 뒤를 따라 요셉은 스무살이 되던 1860년 수도사(Picpus Brother)가 되어 다미엔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신학공부를 하는 동안 그는 선교사가 되기를 서원했고, 3년 후에 그의 형 아우구스테가 하와이 선교사로 가려다가 질병으로 인해 갈 수 없게 되자 그가 대신 가게 되었다.
1864 년 3월 19일, 오랜 항해 끝에 다미엔은 호눌룰루 항구에 도착했고, 이틀 뒤에 그곳에서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당시 하와이 원주민들은 외부인들이 옮긴 전염병들 때문에 수천명이 죽어가고 있었는데 특히 나병은 당시에 불치의 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와의 의회(Hawaii Legislature)와 왕 카메하메하 5세(King Kamehameha V)는 “나병확산방지법”(Act to Prevent the Spread of Leprosy)을 제정하여 모든 나병환자들을 몰로카이(Moloka'i)섬에 있는 칼라우파파 반도(Kalaupapa peninsula)에 강제로 격리, 수용시켰다. 이곳은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있기 때문에 지금도 육로로는 노새를 타고 접근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하 지만 정부는 이곳에 사람들을 격리만 시키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망 가운데 방탕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지역 선교를 책임지고 있었던 매그레 주교(Louis Desire Maigret)는 저들을 위해서도 최소한의 영적인 돌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들에게 사역할 자원 신부들을 모집했다. 어떤 사람을 지명해서 파송하는 것은 곧 사형선고와 같았기 때문에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던 것이다. 이에 네 명이 자원했는데 이들은 6개월 정도씩 돌아가면서 그곳에서 선교하기로 했다. 그 중 처음으로 파견된 사람이 바로 후에 다미엔이었다. 그는 1873년 5월 10일, 처음으로 몰로카이 칼라우파파 반도에 도착했는데 당시 그곳에는 816명의 나환자들이 격리되어 살고 있었다.
칼 라우파파에 온 지 6개월 후 다미엔은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계속 머물겠다고 청원했고, 주교는 이를 허락했다. 그는 이미 이 때 유럽에 있는 그의 형에게 “나는 나환자가 되어 모든 나환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한다”고 편지했다. 하지만 부지런히 사역하던 다미엔은 어느 날 참 자유와 평화에 대해 설교하자 나환자들이 “당신 같이 성한 사람이나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지 우리에게 무슨 자유이며 평화이냐”고 빈정대는 소리를 들었다. 이 말을 들은 다미엔은 자기 방에 들어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하나님이여, 나를 나환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을 건지기 위하여 나환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부지런히 나환자들을 위해 일했다.
몰 로카이에 온지 11년이 지난 1884년 12월, 다미엔은 목욕물을 준비하다가 뜨거운 물이 발에 쏟아져 물집이 생겼지만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나병에 감염된 것이었다. 나병에 걸렸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다미엔은 주교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는 지금 나환자가 되었습니다. 나의 빛나는 희망은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주교님을 땅 위에서는 뵐 수 없게 되었고 천국에 가서나 뵈올 것입니다. 저를 위하여 더욱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로부터 5년 후, 1889년 4월 15일 아침, 다미엔 신부는 49세의 젊은 나이에 나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 미엔의 희생적인 삶을 기려 하와이 주정부는 매년 4월 15일을 다미엔의 날로 선포했고, 2009년 10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를 성자로 선포했는데 그의 시성식에는 550명의 하와이 주민들이 참가했다. 무관하게 그는 자신이 나환자가 되지 않으면 나환자들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나환자가 된 것이다. 그의 희생으로 인해 절망과 죽음의 땅에 살던 몰로카이 주민들은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다미엔은 누구보다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든 비참함을 친히 체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정신을 실천한 분이었다. 그는 십자가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음을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 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그 분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I. 소통되지 않는 세상 (9-11절)
많 은 사람들이 현 한국 정부를 국민과 소통을 잘 못하는 정부라고 비판한다. 국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정부와 국민 사이에도 소통이 되지 않으면 온갖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 소통의 문제
언 젠가 1950년대, 미국에 유학을 하신 전 고신대 총장 오병세 박사님으로 흥미 있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때는 배를 한 달 씩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유학생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사학위를 하는 동안 몇 년을 가족들과 떨어져서 지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전화를 자주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 때는 미리 편지로 전화를 하는 날짜와 시간을 알린 후 우체국에서 국제전화를 했다. 몇 차례 교환을 거쳐 전화가 연결이 되면 미리 종이에 적어온 내용을 일사천리로 읽고 대답하는 사람도 준비하고 있다가 일사천리로 얘기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나면 재빨리 끊었다. 그 때는 3분 통화에 쌀 한 가마였다고 하니 요즘으로 말하면 20만원 정도였다. 말 할 수 없이 통화가 어려웠다.
지 금 우리는 통신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 전화로 공짜, 내지 한 통화당 100원 미만으로 전화를 한다. 특히 한국은 세계 최고의 휴대폰을 만들고 있고, 인구 대비 휴대폰 보급률이 세계 최고이다. 애플의 아이폰의 중요 부품도 모두 한국 제품이다. 어디 휴대폰 뿐이랴! 인터넷이 얼마나 빠르고 좋아졌는가? 집에서는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자기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처럼 사무를 볼 수 있고, 사람들과 연락할 수 있다. 워드 프로세서는 또 얼마나 발달했는가?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한 온갖 기술들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 간의 소통의 문제가 없어졌을까?
아 이러니컬하게 오늘날은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과의 소통 문제가 심각하다. 지식과 정보의 소통은 빠른데 마음의 소통은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있다. 왜 과학과 기술이 발달했는데 사람들 사이의 마음의 소통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가? 그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타락의 근본은 관계의 훼손이며, 소통의 단절이다.
오 늘 본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문제,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우리들은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다. 율법과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도 사람들은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했고, 소통을 거부했다. 오랜 세월을 기다리며 준비하신 하나님은 최후의 방안으로 성육신이라는 최후의 방법을 통하여 우리와 소통하고자 하셨다. 성육신을 통해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소통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성 육신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 분은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셨다. 그 분은 성육신하셔서 친히 우리와 같은 세상에 발을 딛고 사셨다. 예수님은 그 분이 만든, 그 분으로 말미암아 지음 바 된 세상에 피조물인 사람의 모습으로 사셨다. 하지만 피조물인 세상은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오셨지만 피조물인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않았다.
2. 주인을 몰라보는 인간
예수님은 참 빛이셨지만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한탄한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1:3)
소나 나귀만 아니라 개도, 고양이도 자기 주인을 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치매에 걸렸다.
2008년 12월 31일부터 무신론자들의 모임인 영국인본주의자협회가 영국 전역을 운행하는 버스 중 800대에 이런 광고판을 설치했다. 그 광고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신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제 걱정을 멈추고 인생을 즐겨라”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이 광고는 애리앤 쉬린(Sherine)이라는 희극작가가 시작하였다. 그녀는 2008년 인터넷을 뒤지다가 “신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히 고통 속에서 지내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무신론 광고를 결심했다. 그리고 2008년 10월, 광고비용 모금 목표를 8천 달러로 잡았다. 하지만 영국인본주의협회와 무신론 베스트셀러 저자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도움을 받으면서 나흘만에 15만 달러를 모았고, 열흘만에 20만 달러 이상을 모금했다. 그래서 1월 12일부터는 지하철에 광고판 1000개를 추가로 설치했다고 한다. 광고 문구에서 도킨스는 애초에 “신은 없다”라는 단정적인 문구를 원했지만 버스 광고회사인 CBS 아웃도어의 팀 블리클리(Bleakly) 전무는 “영국의 광고 가이드라인에 맞추기 위해선 단정적인 주장을 피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는 그림 전시회에서 화가가 옆에 서 있는 데도 이 그림은 저절로 존재하게 된 것이며 화가라는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같다.
무 신론 도전은 도킨스에 그치지 않았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었던 구 소련의 유리 가가린도 “내가 외계에 나가서 눈을 닦고 봐도 신은 그림자도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불과 수년 뒤 하나님을 곧 바로 만났다. 테스트 파일로트로 일하다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기 때문이었다.
예 수님은 창조주이셨지만 세상에서 환영 받지 못했다. 날 때부터 그는 헤롯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도망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에 가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주인을 창으로 찌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나 그 분이 죽으심으로, 그 분이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 세상은 그 분 안에 있던 하나님의 생명을 받게 되었다.
어 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생명은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개인이 의지적 결단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 분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 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 개개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소개하고 있다. 이 약속은 똑똑한 사람들만이 받는 약속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만이 받는 약속이라면 옥스퍼드의 도킨스가 가장 먼저 받아야 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 그 약속은 어떤 것인가?
II. 영접하는 자의 축복 (12-13절)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natural descent)으로나 육정(human decision)으로나 사람의 뜻(husband's will)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 자녀의 권세
하 나님이 성육신 하셨지만 그 분이 지으셨던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또한 세상이 그를 영접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절에서는 지금이라도 그 분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을 동일하게 말한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세상의 구주로 믿고 그 분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로 결단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녀가 되는 권세(the right)를 주셨다.
여 기서 권세는 헬라어로 엑수시아(exousia)이며 정당한 권위(rightful authority)를 말한다. 엑수시아는 물리적, 자연적인 힘(두나미스)과는 다른 지위나 신분으로부터 나오는 사회적 힘을 말한다. 여기서 엑수시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위 혹은 권세를 말한다. 엑수시아는 부권, 왕권, 소작권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말이다.
예 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갖는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포하는 사람일수록 더 그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릴 수 있다. 자녀가 부모님의 자녀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부모에게 가장 큰 효도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자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하면서 자녀로서의 권세를 행사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권세를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간 증 예화] 9.11. 테러가 난 직후 밴쿠버 공항에서 LA에 가기 위해 비자 인터뷰를 할 때의 이야기이다. ACTS 신학원에서 한국인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이민관이 그게 뭐하는 프로그램이냐고 물으면서 정밀 인터뷰를 받으라고 했다. 사실 내가 교수였다고 얘기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그냥 통과했을 것인데 정밀 인터뷰를 하느라 비행기 출발 5분 전에 게이트에 도착했다.
그 때 나는 한국에서 대학을 사직하고 VIEW라고 하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ACTS에서 기독교 세계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ACTS에서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ACTS 교수는 아니었다. VIEW에서는 엄연히 교수로서 파송받고 있었지만 큰 대학의 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 교수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제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죄스러웠다. 도대체 내가 나를 교수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교수로 인정할 것인가?
하 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좀 더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시고, 그 권세를 누리고 사는 것이었다. 그러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흔히 말하는 “죄인의 기도”(Sinner's Prayer)를 드리면 되는 걸까? 선교회에서 훈련을 받은 분들은 여기에 익숙할 것이다. 나도 대학 시절에 네비게이토라는 선교회에서 훈련을 받았다.
예 수님을 영접하는 것, 다시 말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인간의 편에서는 그 분을 영접하기로 의지적인 결단을 하는 것이지만 의지적 결단조차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도킨스 같은 사람은 아무리 믿고 싶어도 믿겨지지 않는 것이다. 믿는 것, 아니 믿어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요,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3 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즉 부모님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저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방주에 탔다고 해서 아들이 자동적으로 방주에 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의 육정, 즉 인간의 결심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부부가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언제 낳기로 계획을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부부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하 나님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도 이 권세를 빼앗아 갈 수가 없다. 비록 예수님을 영접한 후 죄를 짓더라도 이미 예수님은 우리가 미래에 지을 죄까지 다 용서하셨다. 부모는 자식이 잘못 한다고 그 때마다 호적을 파내겠다고 협박하지 않는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 꾸짖기는 하지만 호적을 파내지는 않는다. 혹 자신이 잘못한 일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는가. 안심하시기 바란다. 우리의 구원은 조변석개 하는 우리의 감정에 달린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
2. 영생의 권세
도 대체 자녀들은 어떤 권리를 갖고 있는가? 미국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에는 모든 인간에게는 세 가지 권리가 있음을 선언한다: 살 권리 즉 생명의 권리, 자유롭게 살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마찬가지로 로고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릴 수 있음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분과 같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자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다.
고려 말 유학자인 우탁(禹倬, 1263-1342)이 지은 “歎老歌”(탄로가)라는 시조가 있다:
한 손에 막대를 쥐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서 지름길로 오는구나.
영 생의 권리만이 아니라 자녀는 맡겨놓은 것도 없으면서 아버지에게 무조건 달라고 할 수 있다. 김세윤 교수는 구원을 정의할 때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 수도관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비록 우리가 믿음이 부족해서 큰 수도관을 연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수원지의 물이 부족해서 갖다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그 무한한 하나님의 수원에 큰 수도관을 연결해서 풍성한 삶을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다미엔이나 가까이는 김수한 추기경, 한경직 목사님, 헨리 나우웬과 같은 분들은 모두 큰 수도관을 하나님께 연결했던 분들이다.
13 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나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세상의 방법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이 가장 먼저 구원을 받았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재산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면 재벌 총수들부터 구원을 받겠지만 성경은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한다.
다른 종교로도 구원 받을 수 없다. 니그렌(Anders Nygren)이라는 신학자는 <Agape and Eros>라는 책에서 세상의 모든 사상과 종교와 철학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 째는 사람이 신에게 나아가는 상향종교이다. 이는 인간의 도덕, 수도, 교육, 율법을 지킴, 고행 등을 통하여 신에게 나아가려고 애쓰는 종교를 말하는데 그는 이것을 에로스적 삶의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원시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제사라는 것도 결국 신을 달래기 위해 인간이 먼저 신에게 나가는 것을 말한다. 율법주의도 일종의 상향종교이다. 율법을 다 지킴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는 것은 전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둘째는 신이 사람에게 나아오는 하향종교이다.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은혜로 찾아오는 것이며, 그는 이것을 아가페적 삶의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연종교들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사상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정신이며, 성탄의 진정한 의미이다.
니 그렌에 의하면 “에로스는 상대방에게 내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먼저 인식하고,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으면 상대방을 사랑한다. 그러나 아가페는 먼저 사랑한다. 그리고 상대방 속에 가치를 창조한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에로스 사랑은 상대방에게 내가 사랑할 조건이 있어야 사랑하지만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 사랑하고, 상대방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창조적인 사랑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오 늘 기독교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꼭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더라도 종국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육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부처님도, 공자님도 훌륭한 분들이지만 성경은 그들을 성육신한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누구를 믿더라도 구원 받는다고 하는 소위 다원주의 신학자들이 가장 싫어하고 인용하지 않는 중요한 몇 개의 구절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12절 말씀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찾아가서 만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에게 육신으로 오신 분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한다.
성 경에서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가장 생생하게 그린 얘기는 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소통이 꽉 막혀 있었고, 사람들과의 소통도 꽉 막혀 있었다. 그 여자는 부도덕한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보일 수조차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우물가에 나올 때를 피해서 우물가에 나왔다. 그러던 그 녀가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과의 소통이 원활해지자 사람들과의 관계도 해결되었다. 그 녀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자 길거리에서 마주칠까봐 두려워하던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자신이 만난 메시아를 전했다. 자신의 선한 행위나 자신이 가진 다른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소통을 위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것이다.
III. 성육신의 의미 (14절)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 성육신의 의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은 성육신을 가장 분명하게 말하는 성경 구절이다. 이 구절은 당시 학자들이었던 헬라 철학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에는 바로 성육신의 정신이 녹아있는 것이다.
“우 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에스케노센”이란 말이네 이것은 “장막을 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막을 연상케 한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분의 임재를 경험하고 느꼈다. 이를 통해 슬픔을 당했을 때 위로를 받고 전쟁 때에는 용기백배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은혜를 입었고, 영생을 얻었다.
말 씀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비우심과 낮아지심이 바로 성육신, 혹은 도성인신(道成人身)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시간 속에 들어오셨다. 이러한 화육, 혹은 성육신의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성육신은 말씀이신 하나님을 인간들에게 표현하게 한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을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한다. 18절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둘 째, 성육신은 말씀이신 하나님과 인간이 소통하게(communicate)하게 한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했다. 헬라어에서 죽음이란 단절, 관계의 파괴를 의미한다. 요14:6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셋 째, 성육신은 말씀이신 하나님을 인생으로 하여금 경험하게 한다. 요일1:1 요한복음과 비슷한 시작 요17:3 “아는 것”의 원 뜻은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다.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우리가 음식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 맛을 보기 전까지는 그 음식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2천 년 전의 성탄이 아니라 날마다 성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가정 예배를 드려보라.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완전한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지만 그 분의 특징은 은혜(grace)와 진리(truth)였다. 그리고 요한은 그런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보았다고 말한다.
어 릴 때부터 같이 동고동락 해 온 친척이나 친구가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한다면 이것은 예사 일이 아니다. 기숙사 생활을 해보면 사람들은 밑천이 드러난다. 뭐 평소에 금식기도, 철야, 방언한다고 난리 치던 사람도 한달만 방을 함께 사용해 보면 밑천이 다 드러난다. 가까이 있을수록 우리의 본성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결혼하기 전에는 대단한 사람 같았지만 부부 간에 한 달만 살아보면 죄악된 인격과 인격이 물렁살도 없이 부딪치게 된다.
그 런데 예수님은 가장 가까이서 그를 보았던,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 십 년을 옆에서 함께 지냈던 친척 형님이 동생을 보고 “그 분은 진실로 하나님이셨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건 보통 심각한 말이 아니다. 가장 가까이서 보았던 친척 동생 혹은 형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고 한다면 사실이다.
2. 성육신과 영지주의
성 탄은 우리에게는 임마누엘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성육신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영원하시고 완전히 자유로운 분이 좁고 좁은 제한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두고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탄생을 두고 “예수님이 정도가 아니고 역사의 수채구멍을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고 했다.
사 도 요한이 말씀의 성육신을 강조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말이다. 이들은 하나님이신 거룩한 분이 천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실 수 없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출발한 이단들이 바로 초대교회의 마르시온파(Marcion 85?∼160?) 나 가현설 이단들이었다.
영 지주의 이단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도성인신(道成人身), 수육(受肉), 혹은 화육(化肉)이라고도 하는 성육신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위격(位格)과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는데 제 2 위격인 아들이 인성을 취하여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다. 성육신의 가장 중요한 성경적 근거로는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을 들 수 있으며,
하 나님이 인간이 되어 구원을 완성했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이다. 요한은 성육신을 십자가와 부활의 전제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로고스(聖子)의 화신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성육신을 부인하고 이것은 인간이 육신 속에 감추어진 신성(神性)을 발견하는 것이며, 육체는 영혼의 임시 거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을 가현설이라고 한다.
로 마 출신의 플라톤주의자이자 영지주의자인 발렌티누스(Valentinus)와 같은 사람은 물질을 부정적으로 보고,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을 부정하였다. 그는 신인 그리스도는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육을 가진 것처럼 보였는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가현(假現, dokesis)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예수가 진정 하나님이었다면 그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초대교회 이단의 하나였던 마르키온 역시 다른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물질을 적대시하고 그리스도 가현설(假現說)을 주창했다.
영 지주의의 도전은 純粹 기독교의 영역을 보호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교회는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복음의 目錄들이 없었으므로 교회마다 사용하는 복음서들이 서로 달랐다. (1) 그런데 영지주의의 도전은 교회가 전체적으로 기독교 경전의 목록을 마련하게 하였다. (2) 영지주의의 도전은 전통의 보장자로서 교회의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 그리고 교회는 누구든지 쉽게 암송할 수 있는 신조형식으로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교리를 요약하게 되었다. 經典, 감독직, 그리고 신조의 방비는 전통적인 교리를 영지주의로부터 보호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4) 또한 정통 교회보다 한발 앞서 영지주의는 신약성경을 주석했기 때문에 교회는 성경주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C의 중반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제자 헤라클레온(Heracleon)이 영지주의적 입장에서 요한복음에 대한 주석을 집필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교회는 영지주의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정경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영 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이단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오신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 가운데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신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를 염려한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4:2);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1:7).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는 명백히 인간의 성정을 지닌 분이었고 희로애락을 같이 한 분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복 음주의자들 중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많아서 혹자는 이를 복음주의적인 영지주의라 부른다. 어떤 사람은 복음주의자들이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것으로 성과 돈과 죽음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주 성경적인 것 같지만 복음과는 거리가 먼 이방사상이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것은 거룩하고 세상의 것들은 속되다고 구분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거룩함의 상징이라고 여겼던 성전을 정화하신 적이 있다. 예수님은 당시에 소위 거룩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던 종교지도자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책하셨다. 이것은 소위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성직자들이라도 그 동기가 바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일한다면 그것은 속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고, 어떻게 하면 빛 된 삶을 살면서 주의 영광을 드러낼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하는 일은 거룩한 것이다.
IV. 말씀화하는 육신
예 수님(말씀)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가 육체를 입으셨다. 예수님이 단지 육체의 껍데기를 입으셨다고 한다면 그런 신은 그리스 신화에도 나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하나.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이다. 오늘 본문은 영원 전부터 선재하시고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자 말씀이셨던 분이 인간의 연약하고 제한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오늘 우리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신광은 목사는 현대 설교자들을 이렇게 비판한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목회자는 육신은 없어지고 말씀만 남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나 그 분의 모습을 닮은 설교자의 인격을 따라서가 아니라 말씀 즉 설교를 따라 철새처럼 이 교회 저 교회로 몰려다니는 있다.
오 늘날 많은 설교학자들은 ‘설교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인터넷에 포르노 다음으로 많은 것이 설교라고 할 정도로 설교가 범람하고, 주옥같은 설교가 즐비한데 도대체 왜 설교의 위기란 무엇인가? 설교의 위기란 한 마디로 설교한 대로 교회와 신자의 삶이 바뀌지 않는 것이다. 설교 따로, 삶 따로... 이것이 설교의 위기가 아니겠는가?
흔 히 사람들이 속기 쉬운 것은 설교를 잘 하는 목사가 더 신령할 거라고 하는 환상이다. 솔직히 오늘날 교인들이 따라다니는 좋은 설교는 인격보다는 재능이요 재주, 즉 말재주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설교의 위기가 생긴다. 말씀이 육신이 되기보다 육신이 말씀이 된 것이 바로 설교의 위기다. 이러한 설교의 위기는 수사학이 도입되었던 4-6세기부터 벌써 나타났던 현상이다. 제롬은 꿈에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키케로의 사람이구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수 사학이 도입되면서 설교는 황금기를 맞는다. ‘기독교의 진리’가 ‘설득의 기술’을 만났을 때 확실히 강력한 영향력이 나타났다. 암브로우스,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제롬 등은 위대한 설교가들로서, 황제조차 그들의 말 한 마디에 두려워 떨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설교자들이 수사학을 배우면서, 초대교회의 능력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해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설교의 황금기 때 교회의 능력은 추락했다. 그로 인해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신자들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수도원에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사막과 광야, 산중으로 길을 나섰다.
사 람들의 말재주를 증폭시켜준 것은 전자매체였다. 앰프는 설교자의 목소리를 증폭해서 많은 청중들이 듣게 했다. 통신 기술은 설교를 전 세계 어느 곳으로나 마음대로 보낼 수 있게 했다. 대용량 기억장치는 설교를 얼마든지 똑같이 저장, 복사, 편집할 수 있게 했다. 비디오 카메라는 설교 뿐만 아니라 설교자의 이미지까지 녹화, 전송, 복사, 편집할 수 있게 했다. 인터넷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 어느 곳에서나 다양한 방식으로 설교를 듣게 한다. 인공위성은 한 사람의 설교를 동시에 전 세계에 퍼질 수 있게 했다.
그 런데 문제는 이 전자 매체가 설교자를 탈육체화, 비인격화 시킨다는 것이다. 전자매체는 모든 것을 전송할 수 있지만 ‘몸’과 인격은 전송할 수 없다. 때문에 전자매체는 본성상 신체와 더불어 인격을 제거하고, 오직 말만을 전달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정 반대 현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셨으나 육신이 되셨지만 오늘 우리 설교자들은 전자매체를 통해 육신이지만 말씀이 되려 한다.
예 수님은 우주의 창조자였으며, 어디나 편재하실 수 있는 분이었지만 연약한 인간의 육체 안에 갇히셨으며, 지역적, 문화적, 시대적 한계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나 우리 설교자들은 전자매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모든 한계를 초월하며, 몸의 한계를 마음대로 벗어나고자 한다. 전자 매체 안에서 설교자는 편재하며, 영원하며, 육신을 벗는다. 이러한 점에서 전자매체는 반성육신(anti-incarnation)이다. 전자매체는 자칫 기독교 계시를 탈육신화, 비인격화 할 수 있다.
이 교회에서도 편의를 위해 음향장치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 정도 사이즈 정도면 앰프가 없어도 설교가 가능하다. 어쩌면 이 교회 크기가 목회자가 성도들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수 있는 최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전자매체가 도입되기 전에는 목회자와 신자들은 신체적 한계와 사회적 조건에 묶여 교회 내에서 비인격화와 탈육신화 현상이 어느 정도 제어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자매체와 함께 모든 구속과 빗장이 풀려버리게 된 것이다. 더 이상 교회 안에는 설교자의 몸과 인격은 증발되고 없다.
전 자매체를 통해 오늘 우리 설교자들은 놀랍게도 육신성을 완전히 벗어버렸다. 온 세상의 존경을 받으며 방방곡곡을 날아다니며 말씀을 전한다. 그들의 설교는 세계 여러 나라로 동시에 생중계되며, 인터넷과 케이블 TV를 통해 언제라도 재생된다. 익명적 공간 가운에 확대 투사된 설교자의 이미지는 점차 가현이 되고 있다. 그들의 몸과 삶은 이미지로 증발해버렸으며 오로지 말씀만 남았다.
이 것은 정확히 가현설자들이 바라보았던 예수의 모습이 아닌가? 설교자는 몸을 벗어버렸으며, 삶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인격이 제거된 이미지요, 기호들이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전자매체를 통해 주옥같은 메시지만을 전하고 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말씀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전했던 그리스도보다는 마르시온이나 발렌티누스, 도케티스트를 더 많이 닮았다.
V. 결론과 권면
나 는 대학에서 조교수로부터 정교수에 이르기까지 근무하다가 현재의 사역을 위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교수로 있다가 사직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소명을 위해 여러 형태로 못한 상태로 나아간 분들, 그래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최근에 창조론 때문에, <하나 되는 기쁨> 때문에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 필화를 당하는 분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깨어진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동일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데 더 정서적 공감을 갖기 쉽다. 과부가 과부 사정을 안다는 말처럼 자기가 겪어서 알게 된 지식은 책에서 읽어서 알게 된 지식과는 이해도가 다르다.
예 수님의 성육신은 그 분이 바로 우리들과 똑 같은 연약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 분은 우리와 같이 모든 육체적인 연약함을 다 당하셨기 때문에 연약한 우리들을 더 깊이 이해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미를 이렇게 적용한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 혹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혹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건강 때문에, 자녀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는가? 내 어려움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없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던 사실을 기억하자. 나 역시 어려움 가운데 있으면서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았던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그의 영광” 즉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고난을 이겨나가자. 예수님도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히2:18).
기 도: 이 시간 주보에 자신의 기도제목을 적어서 옆 사람과 나누어 기도하자.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부담이 된다면 부담이 안 되는 정도의 제목만 적어서 함께 기도하자. 깊은 기도제목을 많이 나눌수록 더 깊이, 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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