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나님의 어린 양

담임목사설교
작성자
jubilel5
작성일
2018-09-06 06:50
조회
4152

요한복음의 전체 주제는 “예수님은 누구신가?”이다. 요한복음을 저술한 목적은 저자가 직접 20장 31절에서 밝힌 것처럼 전도를 위한 것이 분명하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예수님의 많은 표적과 말씀에 대한 기록도 이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1장 초반부터 지금까지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자기가 누군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제 세례요한은 많은 무리들 속에 서 계신 예수님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본문에서 사도요한은 세례요한의 입을 빌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음 다섯 가지로 소개한다.

I.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The Lamb of God.) - 29절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선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그에게 나아오자 사람들에게 보라(behold, look)고 말한다. 여기서 29, 36절에서 “보라”는 말은 그냥 대충 흘깃 보라는 의미가 아니다. 군대 열병식에서 군인들이 사열관을 향해 경례하며 집중하듯이, 서치라이트로 어떤 대상을 집중적으로 비추듯이 보라는 의미이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라고 한 후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아그누스 데이, 아뉴스 데이)으로 소개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유대인들만의 죄를 지고 가시는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 우리 모두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었다. 여기서 지고 간다는 마른 운반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제거한다는 의미도 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세상의 죄를 제거하는 분이었다.

세례요한은 이미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야, 즉 하나님의 어린양 개념을 알고 있었다. 구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예시한다. 대표적인 경우를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린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어린양을 예시하신다. 아버지의 손에 결박되어 장작더미 위에서 죽기를 기다리는 이삭의 모습은 구약에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가장 분명한 예시였다.

둘째, 출애굽기 12장은 출애굽 당시에 애굽의 장자들이 죽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어린양을 예시한다.

“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1-24).

모세가 바로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게 된다. 이 때 마지막 재앙이 바로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뿌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다. 유월절이라는 말은 바로 넘어갔다는 말이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셨다고 말한다.

셋째, 레위기 16장은 속죄의 염소(scapegoat), 즉 아사셀 염소를 통해 어린양을 예시한다:

“5.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양 한 마리를 가져갈지니라 ... 7.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9.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16:5-10).

아사셀(Azazel, לזאזע)이란 말은 “염소”라는 단어와 “떠나보내다”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떠나보내는 염소”(the goat that departs, goat sent out)의 의미이다.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백성들이 가져온 염소 중에 두 마리를 택한다. 한 마리는 속죄의 제물로 죽여서 그 피를 지성소에 뿌린다. 다른 한 마리 아사셀로 뽑힌 염소는 대제사장이 안수하여 백성들의 모든 죄를 전가시키고 광야로 쫓아낸다. 아사셀 염소는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지고 광야에서 유리하다가 죽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아사셀 염소에게 지운 후 그를 광야로 내 보내어 사나운 짐승에게 찢겨 죽거나 굶어 죽게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나운 짐승이 있는 광야에 아무런 방어를 할 수 없는 아사셀 염소를 내 보내는 것은 마치 죄가 없는 예수님이 어둠의 세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 성육신 하셔서 사람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찢겨 죽으시는 것을 상징한다.

넷째, 이사야 42장과 53장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을 가장 분명하게 고난의 종으로 오신 어린양을 묘사한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3-7).

이 외에도 구약에서 예수님을 어린양 혹은 그와 유사한 모습으로 묘사한 곳은 많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비록 희미하지만 다양한 상징으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어가신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죄사함과 구원을 받았다.

II. 선재하시는 분 - 30절

다음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선재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surpassed)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before)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구약은 곳곳에서 하나님을 선재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예를 들면 다니엘서(7:13, 22)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말할 때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the "Ancient of Days")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13),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22)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 형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자기보다 앞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앞의 1장 15절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되었다: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여기서 앞섰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시간적으로 먼저라는 의미이다. 먼저(before)라는 것은 6개월 먼저라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은 다만 세례요한보다 먼저 계셨을 뿐 아니라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이것을 예수님의 선재성 혹은 존재론적 선재성이라고 부른다. 그 분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셨던 분이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은 부처님보다, 공자님 훨씬 후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능력이 뛰어나다(surpass)는 의미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분이라고 말한다. 만물보다 선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인간인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말이다.

III. 예수님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분 - 31a, 33a절

세 번째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알 수 없는 분으로 소개한다. 그는 31절과 33절 첫 부분에서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고 말한다.

31,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I myself did not know him,

정말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몰랐을까? 누가복음 1장 36절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 형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그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고 말할까? 이는 그가 예수님을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는 알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는 예수님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그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두 분 다 매우 경건한 분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임신한 것이 요셉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을 리가 없다.

요셉은 아직 부부생활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마리아가 임신한 것이 드러나자 분노하며 마리아로 수치를 당하게 하기보다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마1:19).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탄생이나 성장하는 중에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마음에 묻은 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면서 산 여인이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예수님이 계실 때 목자들이 찾아와서 그들이 본 것을 요셉과 마리아에게 들려주었을 때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눅1:19)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특별한 출생에 대해 요셉과 마리아는 거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요한복음 7장 3-5절에 보면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오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른 마을에서 자랐던 이종사촌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정체를 몰랐을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없으면 예수님에 대해 아무리 많은 연구를 하는 종교학자라도 예수님을 모를 수밖에 없다. 우리 동네에 계시는 어떤 종교학과 교수는 예수님은 역사상 여러 훌륭한 선생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예수님 외에도 여러 길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많은 공부를 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는 것이 공부를 통해 이루어진다면 구원은 학벌 순서가 될 것이다.

IV.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The Baptizer in the Spirit) - 31-33절

넷째,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도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I myself did not know him, but the reason I came baptizing with water was that he might be revealed to Israel."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Then John gave this testimony: "I saw the Spirit come down from heaven as a dove and remain on him.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사건을 복음서 기자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그러면 세례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1. 물세례를 통해 예수님이 드러난다.

31절에서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그렇게 자세히는 몰랐으나 성령의 인도로(눅3:2) 무리들에게 세례를 줄 때에 비로소 그를 메시야로 확신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세례요한은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는 이유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세례를 주는 것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날 것임을 의미한다. 어떻게 예수님이 드러난다고 말하는가?

2. 예수님은 이 때 성령을 받은 것인가?

32절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예수님 위에 머무르는 것이 곧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예수님이 성령을 받지 않은 것인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령이 내려서 예수님 위에 머물렀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는 심볼로서 사람들 앞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3. 성령은 비둘기와 같이 임한다.

흥미롭게도 사도요한과 누가는 성령의 형체를 비둘기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비둘기는 어떤 존재인가?

구약에서 비둘기는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었다. 비둘기는 가장 값싼 제물로서 소나 양을 드릴 형편이 되지 않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었다. 요한복음 2장 16절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제물인 비둘기를 팔아 폭리를 취하는 자들을 나무라시며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비둘기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였다. 창세기 8장 8절에서 노아는 또 비둘기 한 마리를 내보내서, 땅에서 물이 얼마나 빠졌는지를 알아보았다. 좋은 소식 속에는 평화의 소식도 있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새였다. 사람들은 전쟁을 주장하는 강경파를 매파, 평화를 주장하는 온건파를 비둘기파라고 부른다.

비둘기는 온유와 순결,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아가서 1장 15절에서 신랑은 “아리따운 그대 너무도 아름다워라 내 사랑. 비둘기 눈동자같이 사랑으로 빛나는 그대 눈동자”라고 말하고, 5장 12절에서는 “내 임의 두 눈은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있는 비둘기 젖으로 씻고 시냇가에 앉아 있는 비둘기 같다오.”라고 말한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했다는 말은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에 대해 마태는 이렇게 기록한다: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2:18-21).

4.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3절은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고 말한다. 요한은 자신이 베푸는 물 세례는 예고편이고 본편은 성령 세례라고 말한다. 물 세례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 물 세례는 죄사함을 받는 성령 세례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첫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먼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이어 17절에서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면서 이어 13절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단언한다.

둘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26절에서 성령의 열매를 이렇게 말한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흔히 많은 분들이 성령 세례의 증거로 방언이나 신유, 예언 등 기적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려 함이다: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IV.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34절

마지막으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다.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I have seen and I testify that this is the Son of God."

예수님의 겉모습은 세례요한의 이종사촌이었지만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요, 사람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거니셨던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 세례요한은 바로 그런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해 어린양, 비둘기 등 여러 가지 유비를 사용했으나 끝내 그는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할 수밖에 없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에 비유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해 동안 지은 죄를 생각하며 유월절에 어린양을 대제사장에게 끌고 온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린양에게 안수하여 백성들의 죄가 그 어린양에게 전가되게 한다. 그 후에 그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제단 위에 뿌림으로 모든 죄가 속해졌다고 선포한다.

어린양이 죽는다고 어떻게 사람의 죄가 사해질 수 있는가?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진정한 죄사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온 인류가 지을 모든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성되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수 천년 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한 대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짐승을 대신 죽이는 상징으로 대속의 실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의 시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유월절 어린양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2000년 전 유대 땅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사건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구원을 받았고,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직접 보면서 구원을 받았고, 오늘 우리들은 그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기준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중심적인 가르침이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수양아들, 수양딸이 된 것이다.

V. 결론과 권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드러냄 - 35-36절

마지막으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그의 제자들에게 소개한다. 이것은 진정한 제자도(Discipleship)가 무엇인지, 진정한 주님 되심(Lordship)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The next day John was there again with two of his disciples.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When he saw Jesus passing by, he said, "Look, the Lamb of God!"

35절에서 요한과 함께 서 있었던 두 제자는 누구일까? 37절 이하의 말씀을 참고한다면 여기서 두 제자는 안드레(40절)와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요한이라고 생각된다.

세례요한은 이제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한다. 그렇게 하면 제자들이 자기를 떠나 예수님에게 갈 줄로 알면서도 그는 담대하게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말한다. 실제로 37절을 보면 선생의 말을 들은 세례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쫓게 된다. 우리는 세례요한으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세례요한의 확실한 주님 섬김의 도(Lordship)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으면서도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32, 34절에서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는 제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증언하다”(testify)는 말은 “순교하다”(martyr)라는 말과 동일한 어원을 갖는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순교자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허드슨 테일러에 대한 얘기이다. 그는 1800년대 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머나 먼 중국 땅에 도착했다. 그는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사람들의 옷을 입으며, 중국 사람들과 똑 같이 살았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의 전 생애를 바쳤다. 선교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이 끊기고, 동역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으면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중국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셨다는 이 놀라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 평생을 보냈다. 허드슨 테일러로부터 시작된 중국 복음화로 인해 오늘날 1억 이상의 중국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오게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가 청년 시절, 중국 선교의 비전을 갖고 의학도로 훈련 받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부검하다가 실수로 수술용 칼에 자기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옆에서 보던 교수님은 깜짝 놀라면서 허드슨 테일러에게 곧 죽을 테니까 빨리 집에 가서 집 정리를 하라고 말했다. 그 때 허드슨 테일러는 태연하게 대답하기를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언제라도 자기 집으로 부르실 수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또한 하나님께서 저를 중국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압니다.”("I know that God can take me home any time we wills, but I also know that I have been called to go to China.")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둘째, 세례요한의 제자로서의 도(Discipleship)이다. 제자들이 자기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기쁘게 바라보는 세례요한의 모습은 제자도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를 가리켜 요한복음 3장 30절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한다.

오늘날 주님의 제자라고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자신의 사적인 종인 것처럼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탐욕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특히 집단적 탐욕은 개인들의 영적 예민함을 마비시킨다. 개교회주의나 개단체주의, 개교단주의 등은 개인의 이기심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데 사람들은 이의 심각성을 잘 모른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모든 탐욕은 죄요 우상숭배이다. 소유권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쥬빌리채플이 지향하는 바는 교회가 절대로 사적 탐욕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교회주의는 좁게는 목회자의 탐욕이요, 넓게는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이요, 더 넓게는 온 성도들의 탐욕이다. 교회가 목회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도자의 명예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쥬빌리채플에서는 지나치게 강한 멤버십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유목 교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어느 교회에 출석하든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분 안에서 나는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고, 세례요한과 같이 바른 주님을 섬기는 도, 제자로서의 도를 갖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 끝 -

전체 342
번호썸네일제목본문설교자설교일
342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 눅 15:1-10 | 황선관 | 2025.03.30 |
눅 15:1-10황선관2025.03.30
341 누가 깨어있는 자인가?
누가 깨어있는 자인가?
누가 깨어있는 자인가?
| 눅 12:35-48 | 황선관 | 2025.03.23 |
눅 12:35-48황선관2025.03.23
340 누가 주님의 기도를 드릴것인가?
누가 주님의 기도를 드릴것인가?
누가 주님의 기도를 드릴것인가?
| 눅 11:1-4 | 황선관 | 2025.03.16 |
눅 11:1-4황선관2025.03.16
339 누가 죽을 것인가?
누가 죽을 것인가?
누가 죽을 것인가?
| 눅 9:18-27 | 황선관 | 2025.03.09 |
눅 9:18-27황선관2025.03.09
338 누가 향유를 부을 것인가?
누가 향유를 부을 것인가?
누가 향유를 부을 것인가?
| 눅 7:36-50 | 황선관 | 2025.03.02 |
눅 7:36-50황선관2025.03.02
337 누가 낚일것인가?
누가 낚일것인가?
누가 낚일것인가?
| 눅 5:1-11 | 황선관 | 2025.02.23 |
눅 5:1-11황선관2025.02.23
336 누가 왕인가
누가 왕인가
누가 왕인가
| 눅 2:1-14 | 황선관 | 2025.02.16 |
눅 2:1-14황선관2025.02.16
335 언약과 함께하는 삶
언약과 함께하는 삶
언약과 함께하는 삶
| 수 24:19-33 | 황선관 | 2025.02.09 |
수 24:19-33황선관2025.02.09
334 안식의 역설
안식의 역설
안식의 역설
| 수 22:1-9 | 황선관 | 2025.02,02 |
수 22:1-9황선관2025.02,02
333 성경묵상 과정 3
성경묵상 과정 3
성경묵상 과정 3
| | 이상범 | 2025.01.26 |
이상범2025.01.26